추운 겨울 날이였다. 그녀가 나에게 멀리 이사간다고 말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나의 친구였고 연인은 아니였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용기없는 나는 내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라면 어렴풋이 이런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늘 태연했다. 가끔 나는 그런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혹시 내 마음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야속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흐린 하늘. 그 하늘 아래를 우리는 걸어가며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까지 있었던 일, 멀리있어도 연락은 하고 가끔씩 보자는 말, 장난 삼아 실은 널 좋아했다고 떠보는 말, 그리고 일상의 이야기. 그날따라 그녀는 평소보다 나의 이야기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그러는 중 어느덧 우리는 T자형 골목에 들어섰다. 이별의 골목. 나는 오른쪽, 그녀는 왼쪽. 늘 헤어지는 골목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건강히 잘 지내라고, 가끔은 연락을 하겠다고.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끊으며 집까지 데려다 주려 했다. 잠깐 그녀가 망설인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그녀의 집까지 가는 길. 이제는 가지 않을 길을 지나며 그녀와 나는 말없이 계속 걸었다. 어색한 침묵은 그녀의 집 앞에 와서 깨졌다. 거리는 이미 어스름이 져 있었고 그녀는 집 앞의 가로등 아래 서서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 보겠다고, 진짜 이별이라고, 잘 지내라고. 나도 그녀에게 잘 지내라고 말하며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에 잠시 웃어 보이더니 등을 돌리며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나는 다급히 그녀를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많이 당황한 듯 했다. 커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백하려했다.
"사실은.. 나..."
그녀는 내 말을 끊으며 웃는건지 우는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좋은 친구야. 그치?"
나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대답했던거 같다. 진짜로 간다는 그녀를 나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목걸이 상자를 꽉 쥐며 눈물을 참았다. 그녀가 뛰어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녀의 집을 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목걸이 상자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그녀와 함께 걸어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아마도 나는 웃으며 돌아갔었을 것이다. 아마도.